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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독립기념관, 현충사 알아보기

우리의 역사를 공부하는 데에는 크게 세 부분이 있습니다.

고대상고사, 독립운동사, 분단사 이렇게 세가지로 나뉘어지는데요,

고대상고사는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독립운동사는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의 역사이고, 마지막 한국 근현대의 분단사가 있습니다.

 

이 중 우리가 방문하는 독립기념관은 비단 독립운동사 뿐만 아니라 고대사부터 분단사까지 모두 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

한민족의 역사를 공부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현충사를 방문하여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들으며, 민족을 지키기 위해 몸을 내던졌던 선조의 숭고한 의식을 느껴봅니다.


독립기념관과 현충사를 방문하기 전에 아래 자료를 읽어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될 것입니다. 


 

 ----- 독 립 기 념 관 -----

  독립기념관의 전시관은 7개의 전시관으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제1관 겨레의 뿌리 - 선사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우리 민족의 뛰어난 문화유산과 국난극복사를 주제로 하고 있다

  제2관 겨레의 시련 - 1860년대부터 1940년대, 즉 개항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를 주제로 하고 있다.

  제3관 나라지키기 -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으로 대표되는 구한말의 국권회복운동을 주제로 전시하고 있다.

  제4관 겨레의 함성 - 우리 민족 최대의 항일독립운동인 3·1운동을 주제로 전시하고 있다

  제5관 나라되찾기 - 일제강점기에 조국독립을 되찾기 위해 국내외 각지에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을 주제로 전시하고 있다

  제6관 새나라세우기 - 일제강점기 민족문화 수호운동과 민중의 항일운동,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주제로 전시하고 있다.

  제7관 함께하는 독립운동 - 일제강점기에 조국광복을 위해 국내외에서 전개된 다양한 항일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체험전시관이다.

 

 [우리 역사 이야기]

 독립을 위하여

 의열투쟁

  1909 10월 안중근의사 하얼빈에서 이토 저격

  1932 1월 이봉창의사 일황 저격

  1932 4월 윤봉길의사 홍구공원에서 폭탄 투척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는 18799월 황해도 해주읍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에서 3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세가 되던 1886년부터 의사는 유교경전과 조선역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무예를 익히는데도 관심을 가져 12세가 되던 해부터는 말타기와 활솜씨가 묘기를 부릴 정도가 되었으며, 13세때에는 단총을 들고 포수들을 따라 수렵에 나서 명사수로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16세인 1894년에는 김아려(金亞麗, 당시 17)와 혼인하였으며, 3년 후인 1897년에는 토마스란 영세명을 받고 천주교인이 되었다. 안 의사가 이 같이 성장하고 있는 동안 조국은 외세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되었고, 1905을사늑약의 강제체결로 급기야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에 선각자인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조국의 현실을 직시했던 의사는 1905년 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상해에서 의사는 유력 한인과 외국인 신부들을 만나 조국을 구할 수 있는 여러 방책을 제시하며 그들의 도움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19061월 부친의 부음소식을 접하고 귀국해야만 했다.

 

귀국 후 의사는 서우학회(西友學會: 뒤에 서북학회로 개칭)에 참여해 활동하는 한편, 삼흥학교(三興學校돈의학교(敦義學校) 등을 설립해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초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 관서(關西)지부를 설치해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 이 같은 활동을 벌인 후 의사는 1907년 가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초 연추(煙秋,노우키에프스코에)를 근거로 약 300명 규모의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이 의병부대의 총독에는 김두성(金斗星)이 추대되었고, 총대장은 이범윤(李範允), 안 의사는 참모중장을 맡았다. 의사는 이 부대를 이끌고 그 해 6월 국내진입전을 전개하여 함경북도 경흥군에 주둔하는 일본군 부대를 습격해 수명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7월에는 경흥 부근의 신아산으로 진입하여 일본군을 섬멸하는 한편, 10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의사는 이들 포로들을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의거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석방하였다. 그러나 석방된 일본군 포로들에 의해 의병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그들의 급습을 받아 오히려 대패당하고 말았다. 의사는 단 3명의 병사만 이끈 채 연추의 본 거지로 돌아왔다.

 

귀환 후 의병부대의 재건을 도모하였으나, 그의 포로 석방을 문제 삼은 한인 청년들이 호응하지 않아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비록 의병부대를 재건하지는 못했지만, 의사는 그럴수록 더욱 조국을 구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따라서 그는 19091월 동지 11명과 구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었다. 의사의 약지가 잘린 모습(手形)은 이때의 단지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러한 때,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오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에 의사는 그를 처단할 결심을 하였고, 우덕순(禹德淳)과 사전 계획을 세운 후 조도선(曺道先)과 유동하(劉東夏) 등을 동지로 가입시켰다. 의사는 신중히 검토한 후, 만약 이토오가 탑승한 기차가 하얼빈으로 오는 철로의 교차역인 채가구(蔡家溝)에 정지하면 그 곳에서 거사가 이루어지도록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이 계획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자신은 하얼빈 역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유동하는 통역과 두 공격 지점 사이의 연락을 담당케 하였다.

 

채가구에서 1차 거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19091026일 아침 9시 이토오를 실은 기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다. 이토오는 환영나온 러시아 재정대신 코코프쵸프화 약 30분간 대담을 한 뒤 플랫폼으로 나와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그 순간 의장대 후방에 있던 의사는 뛰쳐나가며 8연발 권총으로 이토오를 조준해 네발을 발사하였다. 세발이 정확하게 명중되어 이토오는 쓰러졌다. 이어 의사는 쓰러진 자가 이토오가 아닐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수행원 중 의젓해 보이는 자들을 향해 다시 세발을 연이어 발사하였다. 이 사격으로 이토오를 수행하던 가와가미[川上] 하얼빈 총영사·다나까[田中] 만철(滿鐵] 총재 등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리고 이토오는 기차안으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30분 후에 절명하였다.

 

의거 후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만세]""를 연창한 후 피체되었다. 이어 일본영사관으로 호송되었다가 여순(旅順)에 있는 일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송치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았다. 재판정에서 의사는 ""나는 한국의 의병이며 지금 적군의 포로가 되어 와 있으므로 마땅히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라고 주장하며 남아로서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사의 정당한 발언은 묵살되었고, 19103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이봉창 의사

 

 

이봉창의사는 19008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효녕대군(孝寧大君) 후손인 부친 이진규(李鎭奎)씨와 모친 밀양 손씨(密陽孫氏) 사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종업원으로 취직했으나 주인으로부터 가혹한 학대를 받게 되었고, 자리를 옮겨 남만(南滿)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견습을 했으나 역시 일본인 직원들로부터조센징이라는 참을 수 없는 수모와 설움을 받았다. 여기서 이봉창은 부모나 이웃 그리고 자신이 받은 민족적인 수모와 설움이 모두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한 그는 철도원 생활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을 전전하며 일어(日語)를 익히는 한편, 상점점원이나 철공소직공·잡부역·날품팔이 등으로 직업을 바꾸면서 일인생활을 익혔다. 이렇게 6년여의일본습득(日本習得)’을 마친 후 독립운동 본거지인 상해로 옮겨왔다. 능숙한 일어를 바탕으로 일인상점에 취직, 임시정부청사와 거류민단 출입의 기회를 잡는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이 기노시타라는 일인식 이름을 쓰는 한국인을 의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같은 사실은 백범에게 전해졌고 임시정부사무원인 김동우(金東宇)를 시켜 면밀히 관찰하게 하였다.

 

이봉창이 단순한건달이 아님을 간파한 백범은 여러차례 비밀리에 면담을 갖고 이 과정에서 김구는 이봉창의 투철한 애국심과 확고한 독립사상에 큰 감명을 받아 신임하게 된다 이후, 김구선생과 이봉창 의사는 1년여의 준비 기간동안 폭탄준비, 여비 마련을 하여 때를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내, 김구선생은 중국 공병창에서 폭탄 1개와 하남성 유치(劉峙)에게서 얻어 온 폭탄 1개를 구하였다. 한 개는 일본국왕의 처단용이었고, 하나는 이봉창의 자결용이었던 것이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김구 선생은 1931126일 프랑스 조계의 임시정부판공서에서 개최된 국무원회의에 이 거사 준비계획을 정식 상정하였다.

 

1212, 프랑스 조계 중흥여사(中興旅舍)로 이봉창의사를 초치하고, 마지막 거사 계획을 완료하였다. 1213일 이봉창 의사는 정식으로 한인애국단에 입단을 하고 선서문을 낭독하였다. 수류탄 2개와 거사금을 건네 받은 의사는 안중근의사의 동생 안공근의 자택에서 역사적인 기념식을 마치게 되었다.

 

일인으로 가장하고 12월말 일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이듬해 18일 일본국왕이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해의 백범에게 물품은 18일 방매하겠다는 암호전보를 보냈다.

 

예정대로 수류탄은 일왕에게 던져졌으나 불행히도 명중되지 못하고 궁내대신(宮內大臣)의 마차만 뒤집어 놓았다. 의사는 현장에서 피체되어 동경의 인고쿠(印谷)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의사는 형무소에 수감된지 9개월이 지난 10월경,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321010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에서는 이봉창의사의 의거를 기념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의사의 의거를 동경폭탄사건의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전세계에 공표하였다. 비록, 일왕의 처단을 이루지 못하였을지라도 의사의 그 의거는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로 이어졌고, ·중협력의 새로운 관계를 통한 독립운동 진작에 큰 활력소가 되게 한 커다란 의열투쟁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의 유해는 19467월 고국으로 모셔져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윤봉길 의사

 

 

윤봉길은 19086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윤황과 김원상을 부모로 모시고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명은 우의(禹儀)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11세때인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3·1독립운동의 함성고 함께 학교를 자퇴하고 이후 1921년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문하에 들어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학 수업을 받았다. 전통교육을 받으면서도 당시 민족잡지인개벽(開闢)등을 구독하며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1926년 서당에서 수학하던 중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당시 윤봉길은 19세였다. 우선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의 문맹퇴치와 민족의식의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밖에도 1927농민독본(農民讀本)3권을 저술하여 본격적인 농촌개혁의 실행에 착수하였다.

 

1928년에는 부흥원(復興院)을 세워 구체적인 농촌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 주된 사업은 농가부업장려 등의 증산운동과 공동판매 공공구입의 구매조합 설치, 토산품(국산품) 애용과 일화배척(日貨排斥), 생활개선 등이었다.

이듬해에는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여 농촌개혁운동을 추진할 중심인물들을 규합하였고 위친계(爲親械), 수암체육회(修岩體育會) 결성을 통한 친목, 체력향상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윤봉길은 193036일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1931년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조국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국무령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된다.

백범과 윤봉길은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19324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 경축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에 접하게 된다. 드디어 기회를 맞은 것이다.

 

이를 위해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의거 3일전인 426일 윤봉길은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여 선서를 하고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을 답사하여 거사에 만전을 기하였다.

 

429일 오전 1140분경 홍구공원에서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윤봉길은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뽑아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위로 투척하였다. 폭탄은 그대로 야촌과 중광의 면전에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백천과 하단은 사망하고 야촌 중장은 실명, 육군중장 식전은 다리를 절단하였으며 중광은 절름발이가 되고 촌정과 우야(友野)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이 의거에 감격하여 종래 무시로 일관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여 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비로소 한국인의 독립운동이 갖는 의미를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윤봉길의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피체된 윤봉길은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28일 일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321219일 순국하였다.

 

윤봉길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 처리장에 방치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6년에 조국에 환국 안장되었다.

 

 

 

무력투쟁

  1920 6월 봉오동 전투

  1920 10월 청산리 대첩

  1940 8월 한국광복군 창설

 

청산리 대첩

청산리 대첩은 192010월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을 주력으로 한 대한독립군 연합부대가 중국 지린성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 대부대와 10여 회의 대격전 끝에 격파하여 대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봉오동 대첩 후 독립군의 사기가 충천해 있을 무렵, 일제는 소위 간도지역 불령선인(不逞鮮人)초토계획을 세웠다. 일제는 만주의 실권자인 장쭤린(張作霖)에게 독립군 탄압을 강요함과 동시에 192010월 초 대규모 정규군을 투입시킬 구실인 훈춘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일제는 약 2만에 달하는 일본군을 간도로 침입시켜 독립군을 초멸코자 하였다. 이에 독립군들은 상호 연락을 취해 일본군의 공격을 일시 피하기로 결정하고 백두산록 서쪽으로 진영을 이동키로 하였다.

 

청산리 대첩(靑山里大捷)은 이와 같이 간도침입과 독립군의 이동 상태에서 전개된 것이다. 백두산록으로 향하던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 등 10여 개의 독립군단들은 192010월 중순 허룽현(和龍懸) 2, 3도구(道溝) 일대에 모였다. 이러한 독립군들의 주둔지를 첩보원을 통해 파악한 일본군들은 약 5천 병력으로 이 지역을 공격해왔다. 따라서 19201021일부터 10여 일간 독립군과 일본군은 대대적인 혈투를 전개하였다. 전투가 일어난 계곡은 이주 한인들이 여러 마을을 형성하여 살면서 청산리 계곡이라 불렀다. 청산리 대첩이라 기록된 이 전첩은 백운평·완루구·천수평·어랑촌 등지에서 10여 회에 걸쳐 전개되었다.

 

결과는 재만 한인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지원 아래 불굴의 정신으로 전투에 임한 독립군의 대승리였다. 청산리 대첩은 일제 침략군과 독립전쟁을 결행해 민족자주독립의 역량을 입증한 빛나는 항일전이었다. 이렇게 하여 일본군의 간도출병작전을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 만주지방의 한국민족독립운동을 보위하는 커다란 역사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또 이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국내의 독립운동도 지켜준 커다란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한민족에게 독립정신을 크게 고취하고 독립에 대한 확신을 더욱 고양시켜 주었다.

 

 

봉오동 전투

봉오동 전투는 중국 지린성(古林省) 허룽시 봉오동 골짜기에서 192067일 독립군을 추격해 들어온 일본군 1개 대대와 싸워서 승리를 얻은 전투이다.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군무위원회 등 세 군단은 연합사령부를 발족시킨 이후 보다 효율적인 독립전쟁의 수행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여러 유격대를 조직하여 국내의 온성·남양 등 두만강변에 설치된 일제의 국경수비대를 습격하는가 하면 더욱 깊숙이 침투하여 침략기관을 파괴하였다.

그와 함께 친일 부호들에게는 군자금을 징수해 그 자금으로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다량의 무기를 구입하였다.

 

연합사령부의 이같은 활동에 불안을 느낀 일본군은 19206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을 사전에 간파한 독립군들은 간도의 허룽현 삼둔자(三屯子)에서 1차 접전을 벌여 크게 승리하고, 다시 왕청현의 봉오동(鳳梧洞) 골짜기로 일본군들을 유인하여 완전한 승첩을 거두었다. 봉오동 대첩이라 기록된 이 대첩으로 독립군들의 사기는 더욱 충천하여 이후 신명을 바친 항일전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한국광복군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창설한 군사조직이다. 1940917일 중국 중경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직할 무장대오로서 창설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0년대 중국 관내를 전전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운영하며 군사양성에 힘을 기울여 왔다.

·일전쟁(1937)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전시체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였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군사정책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중국 정부와의 협의하에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던 것이다. 광복군은 창설 이후 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까지 편입하여 3개 지대와 각 전구 특파단·공작대를 편성함으로써 조직적인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1941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즉각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중국군은 물론 영국군과 미국군과도 연합작전을 수행하여 인도와 버마(현 미얀마) 전선에까지 참전하여 일제와 투쟁하였다. 또한 포로심문, 정보수집, 선전전단 배포, 방송을 통한 심리전에도 주력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45년에는 조국을 우리 손으로 되찾기 위하여 국내진공작전 계획을 세우고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협의하에 특수훈련을 실시하였다.

 

조국광복 후 한국광복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재외동포의 보호임무를 수행하다가 19465월 복원선언서를 발표하고 영광스러운 독립전쟁을 끝내고 환국하였다.

 

김좌진 장군

김좌진(金佐鎭)1889년 음력 11월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金衡圭) 선생과 오숙근 여사 사이의 둘째로 태어났다. 김좌진은 유년시절 글공부보다는 활쏘기말타기전쟁놀이 등을 즐겨했으며, 삼국지와 수호지 및 군사학에 관련된 책자를 탐독하였고 무술연마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또한 계몽운동가인 김광호(金光浩)와 홍주의병장 김복한(金福漢)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김복한으로부터 구한말의병의 기본정신이라 할 의리정신과 민족수호정신을 배웠는데, 이것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앞서 국권회복운동에 노력하였다. 즉 김좌진은 집안에서 거느리고 있던 30여 명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에게 전답을 무상으로 분배한 이후 상경하여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정식 군사교육을 배웠다. 1905년 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홍성으로 귀향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는 한편으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홍주지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등 교육운동과 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군자금 모금과 대한광복회 활동 등 직접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좌진은 1910년을 전후로 이창양행(怡昌洋行)과 염직회사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와 해외 독립운동단체와의 연락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서간도 지역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독립운동군자금 마련을 위해 노력하던 중 피체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김좌진은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군자금 확보에 전념하다가 1917년 만주로 향하였다. 대한광복회의 독립군 양성을 실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김좌진은 지린에서 대한독립의군부와 길림군정사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지린 등 만주와 러시아령 지역 독립지도자들 39명의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도 서명하여 조국광복을 위한 일제와의 적극적인 항일무장투쟁을 강조하였다. 김좌진은 길림군정사를 1919년 대한정의단의 총재 서일(徐一)의 연합제의에 따라 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로 통합하여 총사령관으로 사관양성소를 설치하여 독립군 양성의 중책을 맡는 등 군사부분을 책임지게 되었다. 또한 만주의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등 일제와의 직접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일제는 192010월 만주지역 무장독립군을 진압하기 위한 목적에서 훈춘사건을 야기하고 이어서 만주로 진입하자, 김좌진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催振東)의 군무도독부, 안무(安武)의 국민회군과 연합하여 19201021일부터 26일까지 백두산록의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을 대패시켜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청산리 대첩 이후 일제의 독립군단과 한인사회에 대한 보복으로 독립군부대들은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1921년 자유시참변으로 또다시 북만지역으로 돌아온 김좌진은 이범윤(李範允)이 이끄는 독립군부대와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총사령관을 맡아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의 양성에 몰두하면서 계속하여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준비하였다. 또 한편으로 북만지역 무장독립군단의 통합을 목적으로 1925년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다. 신민부는 무장활동, 교육 및 홍보활동, 산업활동 등 자치활동을 통해 북만지역 한인 동포들의 생활향상에도 주력하였다. 김좌진은 신민부의 총사령관 및 군사위원장을 역임하며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둔전제징병제군구제를 실시하는 등 신민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신민부가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싸고 양분되자, 김좌진은 1927년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고 만주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고 만주한인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한 차원에서 무정부주의를 수용하여 지속적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한편으로 한인사회의 생활안정 도모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 국내와의 연락을 통해 군자금을 모집과 조선총독 처단 계획을 수립하고, 일부 대원을 국내에 파견하여 군사작전에 필요한 지도를 작성하도록 하는 등 국내 진격작전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청산리대첩 이후 계속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김좌진은 만주지역 한인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해림현 산시역 부근에 설치한 금성정미소에서 1930124일 고려공산당 청년회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순국하였다.

 

 

출처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http://www.i815.or.kr/html/kr/index.html

         독립기념관 공식 블로그 http://blog.naver.com/koreai815/

 

 

 

 ----- 현 충 사 -----

소개 & 개요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위업을 선양하기 위한 곳이다.

이순신 장군이 혼인 후 무예를 연마하며 구국의 역량을 기르던 장소이다.

1706(숙종 32) 충청도 유생들이 숙종 임금께 상소하여 조정에서 이를 허락해 사당을 건립하였으며 1707년 숙종임금께서 현충사(顯忠祠)란 액자를 하사하였다.

1868(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현충사는 철폐되었으며, 1906년 을사늑약에 분노한 유림들이 현충사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일체치하에서 이충무공 묘소가 경매로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지경에 처하자 우리 민족 지사들이 이충무공유적보존회를 조직하고 동아일보사의 협력으로 민족성금을 모아 1932년 현충사를 중건하였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1967년 본래의 사당(구본전) 위편에 본전을 준공하였고 이순신 장군 탄신일인 428일을 기념하여 매년 정부주관으로 제전을 올리고 있다.

 

2011년 전시관과 교육관을 갖춘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전시관에는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에 관한 각종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교육관에서는 이순신 장군 정신과 위업선양을 위한 강의와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종전 때인 1598년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사(戰死)하게 되면서 충무공의 호국 정신 및 애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유생(儒生)들이 조선 조정에 건의를 하게 되면서 조선 숙종 32(1706)에 숙종의 어명하에 지금의 자리에 창건하고 이순신·이완·이봉상 3위를 모셨다.

 

수난 및 태동기

그러나 1863년 흥선대원군이 어린 고종을 대신해 국왕 섭정을 하면서 전국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한때 존폐위기에 처하기도 하였고 이에 유생들이 충무공의 업적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반대하였으나 결국 흥선대원군의 명령에 따라 폐지되었다. 1910년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총독부의 압박으로 또 한 번 존폐위기와 수난을 당하기도 하였고 여기에 일본인이 충무공 묘소 및 현충사를 위탁 관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1932년 동아일보사의 주관으로 열렸던 현충사 복원 모금운동 때 모은 성금으로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하여 충무공의 영정을 모셨다.

해방 이후인 1963년에는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현충사의 구역을 확장하고 숙종 때 세웠다는 옛 본전을 대신하여 새로운 본전을 신축함에 따라 충무공의 영정을 옮기기도 했다.

 

충무공 유적지 보존과 이순신 후손의 빚 청산

 

1930년초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가문의 개인적인 빚으로 이순신 사당의 위토가 일본인 투기꾼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당시 조선인 사회운동가인 윤치호는 즉각 이순신 사당 위토 매입을 위한 모금운동을 선언한다. 윤치호가 이순신 후손의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나서자 남궁 억, 한용운, 김성수, 정인보, 김병로, 조만식, 송진우, 안재홍, 홍명희, 허헌 등이 즉각 동참을 선언했다.

 

충무공 종손가의 살림이 점점 영세해지면서 돈을 빌려 쓰다가 1300원의 빚을 지게 됐고 그 이자까지 총 2100원에 이르게 됐다.

19309월 채권자였던 동일은행은 여러 번 빚 갚을 것을 독촉하고 그 해 5월 말일까지 갚지 않으면 위토 60두락(斗落)을 경매에 처분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같은 사실이 언론에 의해 국민에 알려지면서 1931526일 충무공유적보존회가 결성됐고 윤치호는 충무공유적보존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2만 여명이 모금운동에 참여해 16021원의 성금이 모아졌다.

윤치호 위원장을 포함해 남궁 억, 한용운, 정인보 등 1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충무공유적보존회는 성금으로 종손가의 채무 청산과 함께 현충사를 중건하고 위토를 추가 매입했다. 이순신 유적지와 현충사의 위토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가까스로 막아낼 수 있었다.

 

특징

충무공의 애국 충렬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이 사당에는 장검 2자루와 옥로(玉鷺) 1(), '난중일기(亂中日記)' 등 유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이 일대를 성역(聖域)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출처 현충사 홈페이지 http://hcs.cha.go.kr/depart/HcsIndex.a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