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흥왕릉(신라 제23대 514~540 재위)
지증왕의 아들. (지증왕은 왕이란 칭호를 처음 사용했고 이사부가 우산국을 점령하여 울릉도가 신라의 영역으로 된다.)
신라는 지증-법흥-진흥왕으로 이어지면서 부흥하기 시작하고 선덕여왕을 거쳐 무열왕-문무왕을 거치며 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법흥왕은 대표적으로 율령반포, 금관가야병합, 불교공인을 주요 업적으로 꼽는다. 또한 화랑을 내세워 젊은 세력을 키웠다.
이로서 볼수 있는 점은 법흥왕은 기존 귀족의 세력이 강한 신라에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는 것이다.
율령은 법률을 제정하여 공표하는 것으로서 법률에 따라 귀족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것을 의미하고 결국 귀족의 권한이 줄어들고 왕권이 강화되는 효과를 지닌다.
또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키고자 했는데 실행을 못하다가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귀족의 반대를 누르고 불교를 공인했다고 전한다.
신라는 법흥왕 이전에 이미 불교가 전래되었으나 고구려와 백제와 달리 순탄하지 않은것으로 보이고, 불교의 공인은 왕권강화와 관련이 있고 이후 불교는 왕실의 초월적 권위를 나타내는데 적극적으로 이용된다.
법흥왕대에 금관가야 국왕인 김구해가 가족을 이끌고 항복하여 금관가야를 병합하게 되는데 이미 524년에 법흥왕은 금관가야왕과 회견한적이 있었다. 가야의 왕족은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하여 준왕족 대우를 받았는데 결국 김구해의 증손자인 김유신은 신라 통일의 주역이 된다.
변방의 작은 부족 국가로 출발한 신라는 철기생산이 뛰어났던 가야를 성공적으로 병합하며 차츰 강성한 나라로 성장하게 되며 이후 진흥왕대에 이르러 영토를 크게 확장하게 된다.
한때 가야와 영토싸움을 했던 신라가 가야 병합과정에서 가야의 왕족을 신라귀족으로 받아들이는 포용정책을 펴서 성공적인 통합을 이뤄낸 점은 신라의 포용력과 개방성을 나타내며 법흥왕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포인트. 법흥왕릉가는길은 아주 조용한 오솔길이 일품이랍니다. 주변의 풍광을 느껴보세요.
법흥왕을 이은 진흥왕에게는 동륜태자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당시 동륜태자에게는 아들이 있었으나 왕위는 동생에게 넘어가 진지왕이 등극하게된다. 그러나 진지왕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이유로 곧 폐위가 되고 동륜태자의아들인 진평왕이 등극한다.
진평왕은 성골인 남자가 없다는이유로 딸인 덕만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는데 이가 선덕여왕이다. 선덕여왕 사후에는 사촌인 진덕여왕에게 왕위가 넘어가지만 결국 동륜태자가문은 왕위계승이 멈추고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무열왕릉 (신라 제29대 654~661 재위)
이름은 김춘추. 진흥왕의 태자인 첫째 아들이 죽자 둘째 아들인 진지왕이 왕위에 오르고, 훗날 진지왕이 폐위되자 죽은 동륜태자의 자식인 진평왕이 즉위를 한다. 김춘추는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김용춘(혹은 용수),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이다.
김춘추 가문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 가문이었지만 진지왕의 등극으로 왕위가 넘어왔으나 진지왕의 폐위로 왕위는 다시 진흥왕의 첫째 아들 가문(진평왕)으로 내려가고 춘추가문은 진골로 내려앉게 된다.
그러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이 죽고난 후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으로 등극한다.
진덕여왕이 죽은 후 처음엔 상대등인 알천이 천거됐으나 늙고 힘없음을 이유로 사양을 하고 대신 김춘추를 천거하는데 배경에는 김유신의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둘 다 선덕여왕대에 성장한 인물들로 가야계의 김유신은 왕위 계승 서열이 높았던 김춘추의 정치적 배경이, 김춘추는 김서현, 김유신의 군사적 배경이 서로 필요한 관계였다.
이후 김춘추는 김유신의 여동생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로서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의 결혼동맹이 성립하게 된다.
선덕여왕대에는 여왕이라는 이유로 백제와 고구려의 잦은 침입을 받게 되는데 이때 김춘추는 주로 외교관계에서, 김유신은 군사를 이끌고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군부관계에서 성장하게 된다.
선덕여왕대에 지금의 합천 지역인 대야성이 백제에 의해 함락되는데 이때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죽게 된다. 이를 계기로 김춘추는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갖게 되며, 결국 왕이 된 후 당이 백제를 공격하자 김유신이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를 물리치면서 사비성을 점령하며 백제를 멸망시킨다.
이후 김춘추의 아들인 문무왕대에 이르러 고구려까지 멸망시키고 당을 몰아내면서 삼국을 통일한다.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당을 끌어들인데 대해서는 이견이 있겠지만 신라의 입장에서는 당이나 백제나 같은 외국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고 새롭게 부상한 대륙의 강대국인 당을 이용한 신라의 외교적인 노력까지 평가절하하기는 어렵다.
무열왕릉 앞에는 거북이 모양의 비석 받침과 용 문양의 비석머리가 있는데 몸체는 사라지고 없지만 그 조각 기술이 우수해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비문은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썼는데 김인문 역시 김춘추와 마찬가지로 중국통으로 외교에서 많은 역할을 했다. 김인문의 묘는 길 건너에 있다.
무열왕릉의 뒤로는 아주 큰 봉분이 여러개가 있는데 비문이 사라지고 없어서 주인을 알수는 없으나 무열왕릉의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으로 보아 김춘추의 선대 조상일 가능성이 있고 김춘추의 아버지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후대에 추존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포인트. 무열왕릉 뒤편의 대형 무덤들을 한바퀴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산책코스입니다.
김유신 장군묘 (진평왕-선덕여왕-무열왕-문무왕 595~673)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김구해의 증손자. 아버지는 김서현, 어머니는 만명부인이고 여동생이 둘 있었다. 자매중 동생인 문희는 김춘추와 결혼을 하여 무열왕의 비가 된다.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결혼에 대해 처음엔 딸을 가둬두고 못만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보면 신라왕실의 일원인 만명과 가야계의 김서현의 만남은 순탄치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철기가 우수했던 가야사람답게 할아버지 김무력, 아버지 김서현에 이어 김유신도 군사능력은 뛰어났던 것 같다.
그러나 능력에 비해 가문은 갈수록 내리막길이었는데 할아버지인 김무력은 최고관직인 각간에 올랐지만 김유신은 30대에 부장군에 머물러 있었다. (김무력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을 전사시켰다)
그러다 고구려 낭비성 전투에서 지지부진한 공격을 김유신이 돌파구를 마련하며 큰 승리를 거둔다.
이후 김유신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평생 단 한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은 명장이었다.
심지어 백제와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또 다시 백제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집에도 들리지 않고 우물물만 떠오라고 해서 ‘우리집 물 맛은 여전하구나’ 라는 말을 남기고 바로 출정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김유신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대표적인 것이 말 머리를 자른 사건으로 유명한 천관녀와 사랑이야기, 그리고 여동생 문희와 김춘추의 결혼 이야기다.
두 이야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당시 가야계의 출세에 제약이 있었거나 김유신의 입장에서는 신분상승의 돌파구가 절실했다는 점이다.
어쨌든 김춘추와 맺어놓은 돈독한 관계는 이후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군사요청을 하러 갔다가 붙잡혔을때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 국경에서 무력시위를 벌이자 고구려가 풀어준다거나, 진덕여왕 사후에 상대등이던 알천이 대신들의 추대를 받지만 사양하여 결국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때도 김유신의 영향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김유신은 황산벌에서 계백을 꺾고 백제를 멸망시킨 공을 인정받아 당시 최고의 관직인 각간에 大를 붙인 대각간에 오르고 훗날 고구려가 멸망하자 태대각간으로, 후대의 흥덕왕은 흥무대왕으로까지 추존을 시킨다.
김유신에 대해서는 삼국을 통일시킨 위대한 영웅이라는 평가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권모술수를 이용하기도 한 출세지향적 인물이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포인트. 무덤을 둘러싼 돌에서 십이지신상을 찾아보세요.
능지탑
능지탑은낭산의 서쪽에 굴러다니던 돌을 모아 쌓은 것으로 정확한 성격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모양은 십이지신상을 새긴 기단부와 연꽃 문양이 새겨진 돌이 1층을 이루고 있고 흙을 쌓아올린 다음 다시 돌을 쌓아 올린 모양이다.
능지탑은연화탑이라고도 하고 문무대왕의 화장터라고 알려져있다.
문무왕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임종 후 열흘 안에 고문(庫門)밖 뜰에서 인도식으로 화장하라”는 유언을 남겼고 주변에서 까맣게 그슬린 지층이 발견되고 문무왕릉의 비가 일부 발견되기도 했고, 주변에 선덕여왕릉과 사천왕사지, 신문왕릉이 있어서 그렇게 추정하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70년대 발굴시에 원래 모습을 알 수 없어 2층으로 저렇게 쌓았는데 원래는 5층탑이었을것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주변에는 아직 남은 석재가 굴러다닌다.
탑의 몸체에는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신라만의 특징으로 김유신릉은 물론 괘릉, 성덕왕릉, 경덕왕릉, 헌덕왕릉에도 볼 수 있다.
선덕여왕릉 (신라 제27대 재위632 ~ 647)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딸로 최초의 여왕이다. 본명은 덕만.
‘진흥왕의 맏아들은 동륜(銅輪)이었다. 동륜은 572년(진흥왕 33)에 죽었다. 둘째아들은 사륜(舍輪). 그런데 진흥왕에 이어 576년에 진지왕이 되는 사륜은 철륜(鐵輪)의 우리식 발음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철'의 우리 발음이 '쇠'라는 점을 감안할 때, 당시 사람들이 '쇠륜' 또는 '사륜'으로 불렀던 진지왕의 이름은 두 글자 모두를 한자로 옮기면 '철륜'이 되기 때문이다.’
<천년의 왕국 신라>에 기술되어 있는 김기흥의 위와 같은 유추는 신라인들이 불교를 극도로 숭상했다는 데 착안한 결과이다. 이는 곧, 진흥왕이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에서 왕자들의 이름을 따왔다고 보는 해석이다.
전륜성왕은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이상적인 성(聖)왕으로, 불법(佛法)의 바퀴(輪)를 굴려(轉) 천하를 통일한다. 삼국통일의 야망을 품었던 진흥왕은 아버지 법흥왕을 금륜, 자신을 은륜, 장남을 동륜, 차남을 철륜으로 믿으면서, 자신의 시대 또는 아들의 시대에 천하를 하나로 묶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진지왕에 이어 왕좌에 오른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白淨)이었다. 진평왕의 동생들은 백반(伯飯), 국반(國飯)이었다. 또 진평왕의 왕후는 마야(摩耶)부인이었다. 백정은 석가모니의 아버지이고, 백반과 국반은 석가모니의 작은아버지들이다. 그런가 하면 마야부인은 석가모니의 어머니다. 법흥왕, 진흥왕, 진평왕으로 이어지는 신라 왕실은 스스로를 석가모니의 가문과 같은 최고의 가계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들만이 왕이 될 수 있는 성골, 전륜'성'왕의 바로 그 성골(聖骨) 말이다.
하지만 신라 왕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석가모니에게는 아들 형제만 있었는데, 진평왕에게는 덕만과 승만, 그렇게 딸들만 태어났다. 이를 어쩔 것인가. 진평왕의 이름이 석가의 아버지 이름 '백정'이고 어머니의 이름이 석가모니의 어머니 이름 '마야'이면, 태어나는 첫째 아기는 '석가'여야 하는데 딸이 출생했으니!
- 오마이뉴스 –
진평왕은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태자의 아들이었으나 진지왕의 등극으로 왕권계승에서 밀려났지만 진지왕의 폐위로 왕에 등극한다. 이후 자신의 직계를 강화하기 위해서인지 성골로만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신라사회에 형성된다.
김춘추는 아버지, 어머니 모두 왕족이었는데도 진골로 내려앉은 것에 대해 몇가지 주장이 있지만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고, 어쨌든 당시의 성골은 덕만공주와 사촌인 승만공주(훗날의 진덕여왕) 뿐이었다.
그 결과로 아들이 없던 진평왕의 뒤를 이어 딸인 덕만이 왕으로 올라 선덕여왕이 탄생한다.
선덕여왕은 지혜가 있고 성품이 부드러워 나라사람들은 성조황고(聖祖皇姑) 즉, 성스러운 조상의 혈통을 이은 황실의 여인이라는 칭호로 불렀다.
그러나 선덕여왕의 재위기간 동안에는 주변국들의 침략에 늘 시달렸고 내부에는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백제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대야성이의자왕에 의해 함락되자 성주이자 김춘추의 사위인 품석은 부인과 함께 자결을 한다.
다급해진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원군을 요청하지만 오히려 김춘추가 억류되고 결국 이듬해 당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또한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여왕이 국정 운영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난을 일으키고 그 난의 와중에 선덕여왕은 죽음을 맞는다.
이 선덕여왕의 재위 기간중에 크고 작은 침략을 김유신이 쉴새 없이 막아내고 김춘추는 고구려, 당을 쫓아다니며 활약한다. 비담의 난 역시 춘추와 유신이 진압을 하게 된다.
선덕여왕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기틀을 다진 왕으로 평가받는다. 내정에서는 민생을 향상시키고 어려운 자들을 돕는 일에 힘을 썼으며 문화적으로는 유학생을 파견하거나 자장율사를 보내 불법을 들여오는 등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이고 분황사, 황룡사 9층탑, 첨성대와 같은 업적도 남겼다.
선덕여왕에 관해서는 여왕의 지혜로움을 나타내는 일화가 몇 개 내려오는데 실제로 여왕의 예지력이 비범했는지, 혹은 여자라고 무시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포장해서 퍼뜨린 이야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미실의 존재와 천명을 언니로 설정한 점 등은 1989년에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을 따른 것인데 화랑세기 필사본의 진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화랑세기는 김대문이 쓴 책으로 소실됐다고 알고있었지만, 1930년대 일본 궁내청의서릉부에서 근무했던 박창화가 일본이 숨겨두고 있는 화랑세기를 보고 베껴썼다는 책이 1989년에 발견됐다.
이 책에는 향가가 한편 실려있는데 향가는 당시 국어학자들이 겨우 한두줄 해독을 하던 수준이었다. 따라서 해석하기도 어렵던 시절에 개인이 창작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진짜로 보기도 하고, 화랑세기 필사본에만 나오는 인물들이 다른 비문 같은 곳에 전혀 발견되지 않거나 다른 책에서 이미 창작소설의 흔적을 보인 점을 들어 가짜로 보기도 한다.
포인트. 선덕여왕은 자신을 도솔천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하네요. 도솔천을 상상하며 둘러보세요.
사천왕사지와 망덕사지
사천왕사는 문무왕 당시 당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을 가진 절이다.
김춘추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가 문무왕이고 둘째가 김인문이다.
당과 외교에서 뛰어난 수완을 보였던 김춘추와 마찬가지로 둘째인 김인문도 특히 재주가 뛰어나서 당나라 조정에서 많은 신임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를 치고 나자 이번엔 당과 신라가 싸우게 되는데 이 바람에 당에 있던 김인문은 옥에 갇히는 처지가 되고 당은 대대적인 침공을 준비한다.
김인문은 당에 있던 의상대사를통해 당의 침공 사실을 알리고 의상대사는귀국하여 신라에 알린다.
소식을 들은 문무왕은 신하들에게 방책을 묻자 명랑스님이 낭산 남쪽 기슭에 사천왕사를 짓자고 했다.
그러나 이미 당의 배가 신라 가까이 와 있어서 절을 지을 시간이 부족하자 채백(彩帛)으로 절을 지어 문두루라는 밀교비법을 쓴다. 이 채백(彩帛)이라는 것은 아마도 단청재료와 괘불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결국 당나라의 배는 풍랑을 만나 모두 침몰하고 이듬해 재차 공격을 했을때도 문두루 비법을 펼치자 배가 침몰했다고 한다.
이 소문이 당나라로 퍼지자 당에서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게 되는데 신라에서는 사천왕사를숨기기 위해근처에 새로 절을 지어 보여준다.
그러나 눈치가 빠른 사신은 새로 지은 절을 보며 이 절이 아니라고 하자 문무왕은 뇌물을 써서 사신을 회유한다. 결국 당으로 돌아간 사신은 황제의 덕을 칭송하기 위한 절이 맞다라고 보고를 하게 되고 이에 망덕사란 이름이 된다.
황룡사지
진흥왕 14년에 새로운 대궐을 짓다가 거기서 황룡이 나타나 절로 고쳐 지었으며 17년만에 완성했다. 본존인 장륙존불은 진흥왕 35년에 만들어졌다. 진평왕때 금당이, 선덕왕때 9층탑이 세워졌다. 진흥왕으로부터 선덕여왕까지 신라 최전성기 약 100년의 시간동안 세워진 절이다.
신라의 세가지 보물 중 2가지가 이 절에 있었다.
(신라삼보는 진평왕이 하늘에서 받았다는 옥허리띠, 황룡사의 장6존상, 황룡사 9층 목탑이다.)
황룡사는 금당 앞에 탑이 하나 서 있는 형식의 절인데 이런 형식은 삼국시대의 양식이고 불국사처럼 금당 앞에 탑이 2개 있는 쌍탑 형식은 통일신라 이후부터 등장한다.
이 절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고 높이가 1장6척(약5미터)인 불상이 있었다.
장륙존상은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불상을 만들려고 했으나 계속 실패를 하자 인연이 있는 곳에 가서 완성되기를 기원하며 철 5만7천근과 황금 3만푼을 불상의 모형과 함께 배에 실어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중에서 배에 실린 재료로 만든 장륙존상은 황룡사에, 불상의 모형은 울산의 동축사에 모셨다고 한다)
황룡사의 9층 목탑은 당에 유학을 갔던 자장의 요청으로 선덕여왕대에 만들었는데 높이가 67~80m에 달했고 내부의 계단을 통해 9층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한다.
각 층마다 이웃나라를 상징하는데 이 탑이 완성되면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이 목탑은 고려때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버린 후 중수되지 못해 현재는 모습을 알 수가 없다.
21세기인 현재에 와서도 아파트 30층 규모인 목탑을 만드는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 복원계획만 나와있을뿐이다.
특히 목탑은 재료가 나무여서 견딜수 있는 무게에 한계가 있는데 기존에 널리 알려진 목탑의 설계방식에서단순히 높이를 1층 올린다는게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를 통해 당시 신라의 기술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엿볼 수 있다.
포인트. 황룡사 9층목탑 자리를 찾아보세요. 그리고 높이를 상상해 보세요.
경주 박물관에 가면 건물의 끝을 장식하는 황룡사의 치미가 있답니다.
분황사
선덕여왕 3년에 지었다.
신라의 고승인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절이고 이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원효대사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해골에 든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이야기로 유명하다.
원효는 당대의 설법가와 이론가로 이름을 떨쳤는데 귀족중심의 불교를 대중화 시켰다는 것과 통합을 위한 이론인 화쟁사상을 제시한 점을 위대한 업적으로 꼽는다.
이런 원효를 기리기 위해 고려 숙종이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며 비석을 세웠는데 지금은 우물가에 받침대만 남아있다.
또 여기엔 신라때부터 있던 돌우물이 있다.
신라 원성왕때 당나라 사신이 우물에 살고있는 세마리의 호국용을 보고 신통력으로 물고기로 변화시켜 가져가려 했는데 왕이 이를 알고 사신을 쫓아가 되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분황사는 우리에겐 모전석탑이 특히 잘 알려져 있다.
벽돌로 쌓은 탑처럼 보이지만 재료는 돌이고 탑의 네 면에는 입구가 열려있는 감실과 양쪽에 인왕상을 세웠는데 내부공간인 감실을 만든 것은 목탑의 형태를 따른 것이다.
원래는 7층 혹은 9층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임진왜란때 크게 훼손이 되었고 지금의 모습은 1915년 일본인들이 수리 복원을 한 것인데 분황사의 뜰에는 여전히 퍼즐을 맞추지 못한 많은 수
의 돌들이 한쪽에 쌓여있다.
모전석탑이라는 것은 벽돌을 흉내낸 석탑이라는 뜻인데 원래 인도에서는 진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탑을 쌓았다.
인도에서는 돌이 부족했던 탓에 벽돌로 쌓았던 것인데 이것이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는 재료가 돌로 바뀌었다. 화강암 지형이 많아 일찌감치
돌을 다듬는데는 이골이 났던 우리 선조들에겐 진흙을 빚고 굽고 하는게 돌을 깎는 것보다 더 번거로웠던 모양이다.
백제는 탑을 만들면서 목탑을 본딴 형태의 석탑을 만든게 있는데 신라는 벽돌탑을 본따면서 재료만 돌을 이용한 점이 재미있다.
임해전지(안압지)
반월성의 동쪽에 있는 동궁, 별궁으로 알려져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때 궁성 안에 못을 파고 진귀한 짐승들을 키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때는 당과 전쟁중이었는데 아마 백제,고구려의 유민들을 전쟁에 내보내기도 애매하고 놔두기도 애매하여 강제 노역의 형식으로 공사를 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화려했던 이곳은 훗날 폐허로 변해 기러기와 오리가 노는 연못으로 변했는데 조선시대 시인들이 안압지라 불렀다.
1970년대에 와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세우고 연못만 준설하기로 했는데 여기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약3년동안 6만5천명이 동원돼 발굴을 했는데 이때 나온 유물만 17500여점이 넘고 이중에 700점 정도를 경주박물관에 별관으로 전시중이다.
실제로 다양한 짐승의 뼈가 나와 여러가지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사실임을 알려준다.
일반적인 유물은 주로 무덤에서 나와 장례나 의식용 물품인데 반해 여기서 나온 것들은 생활용품이 주로 나와 신라인의 생활상을 엿보는데 도
움이 된다.
바닥의 뻘에서는 신라시대의 배가 3척 발견되었는데 힘든 보존작업끝에 현재는 박물관 별관에 전시 되어 있다.
특히 여기에서 주령구라고 불리는 14면 주사위가 발견되었는데 글씨의 내용은 술자리 벌칙이 새겨져있다.
그러나 이 유물은 75년 서울로 가지고 가서 수분을 제거하려고 전기오븐으로 말리다가 과열이 되어 재로 변하고 말았다. 현재의 유물은 복원품이다.
첨성대
첨성대는 별을 관측하는 건물로서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등 나라마다 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물로 남아있는 것은 신라것으로 경주에 남아있어서 우리에겐 첨성대 하면 경주의 것을 떠올린다.
경주의 첨성대는 선덕여왕때 만든 것으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서 어떻게 별을 관측했다는 것인지에 정확한
용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최근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유적이 발견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는 스톤헨지도 밀려날 판이라고 한다.)
어쨌든 기록에서 이미 첨성대라는 이름이 붙은 점, 입구의 사각형 창 부분에 사다리 자국이 나 있는 점 등을 들어 천문대로 보는 의견도 많다.
첨성대를 쌓은 돌은 모두 362개로 음력으로 따진 일년의 날 수와 같고 둥글게 쌓은 27단은 선덕여왕과 연관짓거나 맨 위 井자 모양의 돌까지 28단은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고 한다.
가운데 네모난 창의 아래 위 12단은 12달, 위의 12단까지 포함하면 24절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꼭대기의 네모난 돌은 신라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으며 각 면이 정확히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킨다.석단 중간의 창문은 정확이 남쪽을 향하고 있어 춘분과 추분 때에는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가지 완전히 비치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랫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져 춘하추동을 나누는 분점의 역할을 하였다.
첨성대를 서쪽에서 보면 북쪽으로 기울어져있다.
1920년대 일본인들이 길을 낼 때 첨성대 북쪽에 길을 냈는데 6.25 전쟁당시 장갑차가 막 지나가는 바람에 북쪽으로 제법 기울어진 것을 나중에 밧줄을 매어놓고 당겨서 조금 바로 잡았다고 한다.
감은사지
신문왕 2년에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이어 만든 절
문무왕은 해변에 절을 세워 왜구를 격퇴시키려 했으나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
이에 지의 스님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호국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이니 죽거든 인도식으로 화장을 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에 따라 화장을 하고 동해에 안장을 했는데 신문왕이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의 감은사라 했다.
금당의 아래에는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을 팠는데 해류를 따라 용으로 변한 문무왕이 법당에 와서 법문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한 구조다.
현재 감은사 옆을 흐르는 대종천은 물이 아주 적은데 신라시대에는 제법 깊은 물이어서 감은사 앞에는 배를 댈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고 한다.
몽골의 침입당시 황룡사에는 성덕대왕신종의 네배가 넘는 큰 종이 있었다고 하는데 몽고군은 그 종을 배에 실어 가져가려다 감포 앞바다에 빠뜨렸다는데 그때 큰 종이 지나갔다고 하여 대종천이라 부른다.
감은사에는 감은사지 3층 석탑이 있는데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극찬을 했던 석탑이다.
우리나라 석탑의 대표라고 하면 불국사의 석가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감은사 석탑은 그 보다 앞선 것이다.
이 감은사 탑은 기단을 2단으로 한다거나 목탑처럼 추녀가 살짝 들린다는 등의 특징이 보이는데 이 탑이 사실상 우리나라 석탑의 모델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조형미가 뛰어난 탑이다.
- 경주에서 법륜스님과 청년학교와 함께 즐거운 추억 만드시길 바랍니다^^
- 자료집은 울산 청년학교에서 만들어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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